개요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 있던 시절, 백제로 건너가 보과공주(宝果公主)와 사사로운 정을 나누었다. 법흥이 신라로 돌아간 뒤에 보과는 법흥을 찾아 궁을 도망쳐 신라로 왔다. 입궁하여 남매인 남모와 모랑을 낳았는데 두 아이 모두 어머니를 닮아 용모가 뛰어났다.

 

스토리

 

시종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법흥은 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냐?”
“지금 궐 밖에 한 여인이 찾아와 국공을 뵙겠다고 합니다.”
“여인이라고?”
“예. 처음에 그 여인의 행색이 매우 누추하여 궁문을 지키는 군졸들이 쫓아내려 했으나 매를 맞으면서도 울면서 그 자리에서 버티는 통에 내쫓지도 못하고 바깥이 매우 소란스럽다 합니다.”
“네가 가서 그 여인을 데리고 오너라.”
잠시 후 시종이 데리고 온 여인을 보고 법흥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헝클어진 머리에다 초라한 행색을 하고, 얼마나 많이 걸었는지 다리를 절뚝이며 피로에 지친 표정으로 시종을 뒤 따라 오는 그 여인은 분명 백제 동성왕(東城王, 479-501)의 딸 보과공주였던 것이다.
“아니 백제땅에 있어야 할 공주가 어찌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서 있단 말이오?”
법흥은 혼란스런 목소리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비왕 때(475) 고구려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백제땅이 어려움이 처하게 되었다. 이때 백제로부터 원군 요청을 받은 신라는 군사와 병기를 보내 백제를 도왔고, 그 일을 계기로 신라와 백제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백제와 신라간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국공의 자리에 올라있던 법흥은 사사로이 백제를 드나들게 되었는데, 백제땅에서 법흥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람이 바로 보과공주였다. 보과공주 역시 법흥에게 첫눈에 반해 두 사람은 백제땅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법흥은 신라의 왕손이었고,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법흥은 얼마 후 신라로 돌아와 총애하던 빈첩들에 둘러싸이게 되자 보과공주를 금새 잊어버리게 된다.

정작 애가 닳은 것은 보과였다. 법흥이 떠난 뒤 하루가 다르게 쌓여 가는 그리움으로 병이 든 보과는 이대로 법흥과의 인연이 끊어져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기게 이르렀다. 물론 아버지 동성왕에게 청하여 법흥에게 시집올 수도 있었지만, 골품을 중히 여기는 신라에서 백제의 공주를 정실부인으로 삼아줄리 없을 것이고 그렇다고 백제에서 애지중지하는 공주를 빈첩으로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보과는 법흥을 찾아 자신이 직접 신라로 가는 길 밖에는 도리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평범한 백성들의 옷을 구해다 입고는 궁을 몰래 빠져나와 신라땅을 향해 걷고 또 걷기 시작했다. 준비해 온 먹을거리가 다 떨어지고 난 뒤에도 족히 한나절을 더 걷고 나서야 해질 무렵 보과는 간신히 월성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미 보과의 행색 어디에서도 공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마치 전쟁 끝에 살아남은 처녀아이와 다름없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당연히 병사들이 법흥을 만나게 해 줄리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몇 백리를 걷게 한 법흥을 만나자 보과공주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법흥 또한 자신을 찾아 공주의 신분을 버리고 궁을 도망쳐 몇 날을 걸어온 보과공주에게 복받치는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보과공주는 그 날부터 사량궁 하나를 차지하고 한동안 법흥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벽화와 오도, 옥진에 이르기는 절세미인들을 곁에 두었던 법흥이지만, 법흥을 진정 마음으로 사랑한 여인은 보과공주 뿐이었다. 법흥도 그것을 알았기에 보과에 대한 총애가 쉽게 식지 않았다. 후에 보과는 남모와 모랑 두 남매를 낳게 되는데, 두 아이 모두 어머니를 닮아 미모가 출중한데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의리가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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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종목 올림픽

  • Art competitions at the Summer Olympics
  • 1912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올림픽 ~ 1948년 영국 런던 올림픽까지 이어진 예술대회.
  • 40년 동안 147명이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올림픽의 공식적인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다. 
  • 음악 분야 종목 : 합창, 오케스트라, 성악, 독주, 독창, 기악 등 
  • 미술 문야 종목 : 회화, 판화, 조각, 수채화, 공예, 건축 등
  • 문학 문야 종목 : 서정시, 서사시, 극시 등

스톡흘름 올림픽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올림픽이다.

1. 국가 대항전의 시초 올림픽

2. 순금 메달을 준 마지막 올림픽 

3. 전자 측정기가 도입 된 올림픽 

4. 예술 종목 올림픽이 최초로 열린 올림픽 

 


왜 예술대회를 올림픽에서 열었나?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였던 피에르 드 쿠베르탱(Barren Pierre de Coubertin)은 청소년 교육에 관심이 많았었다. 스포츠가 청소년에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쿠베르탱은 1894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를 조직하고, 1896년에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제 1회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그는 육체 뿐 아니라 정신적인 예술 활동도 스포츠라고 보았기 때문에 예술과 결합 된 운동을 진정한 스포츠로 여겼다. 특히 올림픽이 다른 운동 경기와 다르게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한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경기라는 점도 예술 대회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왜 쇠퇴하게 되었나? 

1. 대부분 예술 대회를 올림픽에서 열어야 되는 필요성을 못 느꼈다. 

2. 경기 기록이 분명한 운동과 다르게 예술은 주관적이라서 상에 대한 불신이 많았다. 

3. 아마추어 보다는 이미 전문가인 사람에게 유리했다. 

4. 주제가 스포츠로 한정 되다 보니 비슷한 주제에 수준이 낮은 작품들이 많았다. 

5.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출전하는 선수들이 많지 않았다. 

6. 1924년에는 아티스트보다 배심원이 더 많을 정도였다. 

 


 

이렇게 올림픽에서는 더 이상 예술 올림픽에 메달을 주는 대회는 사라졌지만,

나이가 70 먹어 달릴 수 없는 사람이 메달을 받거나, 

수영 금메달리스트가 건축학으로도 금메달을 받는 건 꽤 의미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근육질의 잘생긴 육상 선수가 섬세하게 그림 그리고, 철학적인 시를 읊으면 확실히 한 쪽만 잘 하는 사람 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일테니 말이다. 

 

 

등수 국가 국가코드 합계
1 독일 GER 7 7 9 23
2 이탈리아 ITA 5 7 2 14
3 프랑스 FRA 5 4 5 14
4 미국 US 4 5 0 9
5 영국 GBR 3 5 1 9
6 오스트리아 AUT 3 3 3 9
7 폴란드 POL 3 2 3 8
8 핀란드 FIN 3 1 1 5
9 스위스 SUI 2 4 1 7
10 벨기에 BEL 2 1 5 8
11 네덜란드 NED 2 1 3 6
12 룩셈베르크 LUX 2 1 0 3
13 스웨덴 SWE 2 0 2 4
14 헝가리 HUN 1 2 1 4
15 그리스 GRE 1 0 0 1
16 덴마크 DEN 0 5 4 9
17 체코슬로바키아 TCH 0 1 2 3
18 아일랜드 IRL 0 1 2 3
19 캐나다 CAN 0 1 1 2
20 남아공 RSA 0 1 1 2
21 노르웨이 NOR 0 1 0 1
22 일본 JPN 0 0 2 2
23 모나코 MON 0 0 1 1
합계 45 53 49 147
  1912 1920 1924 1928 1932 1936 1948
개최장소 Stockholm Antwerp Paris Amsterdam Los Angeles Berlin London

 

주목 할 만한 작품

 

미국의 말 사육사. Walter W. Winans

1908년에 사격으로 금메달 획득

1912년에 사격으로 은메달 획득, 조각으로 금메달 획득

 

 

헝가리의 건축가 Alfréd Hajós 

1896년 수영분야 100m 자유형과 1200m 자유형에서 금메달 획득 

1924년 도시계획 분야에서 은메달 획득 Alfréd Hajós National Swimming Stadium

 

 

운동 분야와 예술 분야 2가지에서 모두 메달을 받은 사람은 위에 언급한 W.W.W와 허요시 알프레드 뿐이다. 

 

일본의 예술가 류지 후지타 Ryuji Fujita 藤田隆治

1936년 그림 분야에서 동메달 "Ice hockey"

 

일본의 예술가 Sujaku Suzuki 鈴木 朱雀

1936년 스케치 및 수채화 분야에서 동메달

"古典的競馬" ("Classical Horse Racing in Japan").

 

 

예술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동양 국가는 일본인 뿐이다. 

세계 대전이 한참일 때 열렸던 예술 올림픽의 최대 메달 획득 국가가 독일인 점을 감안한다면......

전범 국가의 영광이므로 그리 자랑스러운 상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일본인이 그린 저 그림들은 나치가 수집 한 후 소실 되었다고 한다. 

 

남아공의 추상 화가 월터 배티스 Walter Whall Battiss

1948년 조각과 에칭 분야에서 동메달 수상 Seaside Sport

국적은 남아공이지만 영어권 백인이며, 1949년 피카소와 친구가 되었다. 

 

남아공의 시인 에른스트 반 헤르 덴 Ernst van Heerden

1948년 시문학 분야에서 은메달 수상 "Six Poems"

월터 배티스와 마찬가지로 국적은 남아공이지만 백인이다. 

 

 

음악 분야는 자료를 찾아 봤지만 올림픽 관련 되어 남아 있는 자료가 거의 없다. 

 

오스트리아 동전 조각가 Edwin Grienauer

1928년에 조각으로 금메달 "Médailles"

1948년에 조각으로 동메달 "Prize Rowing Trophy"

 

 

미국의 건축가 John Russell Pope

1932년 건축으로 은메달

예일 대학에 있는 이 체육관은 가장 큰 운동 시설 중 하나이다. 

 

영국의 예술가 John Copley

1948년 그림과 조각 분야에서 은메달 "Polo Players"

가장 나이가 많은 메달리스트이며, 예술 올림픽의 마지막 은메달 리스트이다.

 

 

독일의 조각가 Emil Sutor. Hurdle Runners.

1936년 조각으로 금메달

 

룩셈부르크 미술 교사 Jean Jacoby

1924년 드로잉 분야에서 금메달 

1928년 드로잉 분야에서 금메달 왼쪽의 럭비

예술 올림픽에서 유일하게 금메달을 2번 받은 예술가이다.

 

 


위키 백과 : 예술대회 올림픽 메달 리스트 보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901화에서 다룸 [ 서프라이즈 목록 보러 가기 

서프라이즈에서는 공민왕 때의 이야기라고 했는데, 조금 의문이 든다. 

고려의 31대 왕 공민왕은 1330년에 태어나 1374년에 사망했는데, 재위 기간은 1351년~1374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찾아보면 고려시대 홍순이라는 이름은 홍순(洪順), 홍순(洪淳)으로 2사람이 나오는데, 이제현의 역옹패설에 나오는 이름은 봉익대부 홍순(洪順)이다. 

 

홍순(洪順)

첨의중찬 홍자번의 아들이다.

1279년 첨의평리가 되었다.

고려의 25대 왕 충렬왕 때 사람이다. 

충렬왕 재위 기간 : 1274년 ~ 1298년 

 

홍순(洪淳)

1358년 공민왕 7년에 판태상시사로서 원나라에 인삼을 바쳤다. 

1363년 밀직상의로서 원나라에 파견되어 백관기로의 서를 바쳤다. 

1364년 원나라가 의주에 침입하자 홍순은 고려에 지조를 지켰다.

1376년 사망 (우왕 2년)

 

 

[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제현의 역옹패설 

 


 

어쨌든, 역옹패설에 따르면, 홍순은 이순(李淳)과 평상시 바둑 내기를 하곤 했다. 

1. 홍순이 바둑에서 이겨 이순의 거문고를 갖게 되었다.

2. 이순은 홍순에게 귀신 붙은 거문고라고 거짓말을 한다. 

3. 날이 추워 거문고가 쨍 하는 소리를 내자 홍순은 겁이 나서 거문고를 회초리로 때린다. 

4. 다음날 홍순이 거문고를 돌려 주러 이순을 찾아가지만 이순은 받지 않는다. 

5. 결국 겁에 질린 홍순은 지금까지 내기에서 딴 골동품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거문고를 돌려 준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901화에서 다룸 [ 서프라이즈 목록 보러 가기 

 


공민왕과 관련 된 거문고 전설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1946년 만공이라는 자가 스님으로 입적한다. 

만공은 조선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 이강(義親)과 친해서 궁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평소 예술을 사랑하던 만공은 의친왕에게 조르고 졸라서 왕가의 보물이었던 공민왕의 거문고를 손에 넣는다. 

만공은 공민왕의 거문고를 개구멍을 통해 가지고 나갔고, 충남 예산군 수덕사에 아직까지 보관하고 있다. 

 

[ 출처 : 문화콘텐츠닷컴_산조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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